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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2 오후 3:05:59 입력 뉴스 > 안동뉴스

[우리 마을이야기]
안동 북쪽 관문 북문동을 돌아보다
[안동시 공동기획연재] 안동예천근대기행(8)



태사묘와 장터가 있는 북문동 골목의 시간

 

 

안막동에서부터 천리천을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들던 물길이 지나고, 안동읍성 북문 문루가 있었고, 고려의 흔적이 새겨진 태사묘와 장터가 있는 북문동 골목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다시 돌아본 북문동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 안동시 북문동 지적도. 북문시장이 들어서기 전으로 북문동 구역과 태사묘, 자혜의원(현 안동의료원), 안동시청(현 안동시보건소)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안막동에서부터 신안동, 북문동을 지나 천리동으로 흘러내려가던 천리천 물길이 표시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70년대 안동의 모습을 알 수 있는 1979년의 안동시 북문동 일대 지적도 (출처:국토정보지리원)
 

북문동은 안동시 중구동에 속하는 동네로 조선 후기에는 안동부 북부에 속하던 지역으로 1947년 해방이 되고 일본식으로 변경했던 동 이름을 삼산동, 서부동, 북문동, 옥정동, 율세동, 신세동, 법흥동, 동문동, 동부동, 운흥동, 남문동, 남부동, 천리동으로 세분하면서 북문이 있던 곳이라 하여 특별히 북문동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북문동이라는 지명은 이곳이 안동부 읍성 안에 속했던 동네로 북문 문루가 있는 곳이었음을 알려준다. 영가지에 따르면 안동읍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안동부내 읍성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947자이고 높이는 8자이고 안에 우물이 18개소, 도랑은 2개소, 못은 5개소였고 성의 4 곳에 문루가 있었다. 태사묘 옆 담장을 따라 안동의료원 쪽으로 올라가는 길 끝쪽 약국 앞에서 북문읍성의 표식을 만날 수 있다. 북문읍성 표지석과 함께 바닥에 읍성지도가 인장처럼 새겨져 있다.

 

▲ 북문읍성 표지석 Ⓒ이미홍
 

북문읍성 표지석과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안동의료원이 있다. 1912년에 자혜의원으로 문을 열었다. 지역민을 위한 의료 시설 확충과 지역의료 발전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경상북도가 전액 출자해 설립한 북부지역 공공의료기관으로 거듭난 도립안동의료원은 한 자리에서 100년이 넘는 시간을 안동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다.

 

▲ 안동군처와 자혜의원 사진(유리건판. 1915 국립중앙박물관)
 
▲북문동에서 100년의 역사를 이어온 도립안동의료원 Ⓒ이미홍

 

고려 속의 안동을 만날 수 있는 태사묘

 

북문읍성 표지석이 있는 지점에서 안동의료원을 등지고 골목을 따라 내려가면 태사묘담장과 만난다. 북문동의 터줏대감이라 할 수 있는 태사묘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의 병산전투에서 왕건을 도와 견훤을 물리친 권행, 김선평, 장길 삼태사를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태사묘 대성전 안에는 고려를 개국하고 왕이 삼태사의 공을 치하하고 세 성씨를 내린 흔적들이 중수기에 기록되어 있다. 태사묘 안 보물각은 삼태사가 아닌 홍건적의 난 때 노국공주와 함께 안동으로 몽진을 왔던 공민왕과 고려왕실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유물을 보존전시하기 위한 보물각1963년에 건립되었다.

 

▲ 태사묘 본당 대성전 (유리건판 1915년, 국립중앙박물관)
 

시내 북문동 도심 골목에 자리하고 있는 태사묘는 삼태사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묘, 즉 사당이라는 말이니, 도심 골목 안에 역사적 위인을 위한 추모공간을 세운 것이다. 안동부라는 지명과 함께 고려시대로부터 이어져내려온 이 골목의 역사성을 보여주는 태사로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태사묘 깊숙한 안쪽에 삼공신을 모신 사당이 있고 삼태사의 묘정비와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삼태사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하는 것이 태사묘의 첫 번째 존재이유일 것이다. 태사묘가 생긴 이래로 오늘까지 삼태사의 후손들이 그 일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 태사묘에 관해 설명하고 있는 정제 권정찬 Ⓒ이미홍

 

권태사의 후손으로 오랫동안 태사묘 일을 봐왔던 권정찬 선생을 만나러 태사묘를 찾아간 날, 중구동 도시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태사묘 앞 골목길이 속까지 깊이 파헤쳐져 바닥이 드러나 보였다. 태사로 골목에 전선을 땅속으로 묻는 지중화사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태사로 거리를 재생한다고 동의서를 받으러 왔더라고요. 우선 불편해도 감수를 해야지요. 담장 낮추는 것에도 삼성 대표들이 동의를 했고요."

 

태사묘가 있어서 붙여진 거리 이름 태사로에 대한 자부심과 책임감이 함께 있는 셈이다. 시청에서 근무하면서 태사묘를 자주 드나들게 되면서 퇴직 후 자연히 권씨 문중 어른들에게 눈도장이 찍혀 태사묘 일을 이어받아 하게 되었다는 권정찬 선생은 태사묘에서 첫 번째로 공을 들이는 일이 향사라고 했다.

 

"향사를 올리는 것이 후손들이 하는 가장 중한 일이지요. 세 성씨의 후손들이 같이 준비해서 향사를 올리는데 전국 각지에서 후손들이 태사묘에 모여 선조들 앞에 고하는 자리이기도 하지요. 향사를 무사히 잘 치르고 나면 그해 가장 큰 일을 마친 셈이지요."

 

 
▲ 태사묘 대성전에서 고지기와 이야기하고 있는 권정찬 Ⓒ이미홍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집안 어른들 중에 삼태사와 태사묘 내력이며 보물각에 얽힌 이야기들을 낱낱이 꿰고 있는 분들이 계셔서 참 좋았는데, 그 어른들이 돌아가시고 난 후로 태사묘를 제대로 지켜나가는 일이 후손들에게 점점 쉽지 않은 숙제가 되고 있다고 말하며, 상주하는 관광해설사 분에게 열쇠를 받아 잠겨있던 문들을 열어주었다.

 

▲ 태사묘 사당 문을 여는 태사묘 해설사 Ⓒ이미홍
 

알고 보면 태사묘는 삼태사만의 공간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왕건을 도와 고려의 시작을 함께한 삼태사의 이야기를 품은 공간과 홍건적의 난 때 몽진하여 안동에 70여일을 머물고 간 공민왕과 왕실 가족들의 이야기가 담긴 보물각의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두 공간을 나누는 작은 문이 사이에 있어 중문을 넘어가면 보물각이 자리한다.

 

▲ 고려 공민왕이 내린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태사묘 보물각 Ⓒ이미홍
 

대성전과 사당 공간이 삼태사의 공간이라면 보물각은 공민왕의 공간인 셈이다. 공민왕 일행이 몽진을 와서 70일을 머물며 홍건적의 난을 물리치고 상경 하면서 왕실을 보필한 고창 백성들을 치하하고 왕실 물품들을 하사했으니, 보물 제451호로 일괄 지정된 공민왕의 교지와 관모, 옥관자와 200여점에 이르는 물품들이 보존, 전시되고 있다.

 

관광해설사가 상주하고 있어 누구라도 신청을 하면 문을 열어줄 뿐 아니라 해설까지 곁들여 들을 수 있다. 웅부공원이 지척이고 시내 어디서도 접근이 어렵지 않으니 볕 좋은 날 잠시 시간을 내어 보물도 구경하고 고려와 안동의 오랜 내력을 해설로 들어보면 좋을 것이다.

 

태사묘 열 골목안 두 번째 집에 살던 기억

 

고향이 예안면 귀단리 고통인 임옥순은 1948년 생으로 이웃 동네에 살던 이문원과 혼인을 하고 아들 형제를 낳았다. 처녀 때 안동읍내에 자취를 하며 미용학교를 다녔고 혼인을 하고 난 후에 시내로 나와 살아서 60년대와 70년대 북문동의 모습을 많이 기억하고 있었다. 옥순씨가 미용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분수대 지나 버스터미널까지만 포장이 되어 있고 북문동 다리가 있던 지금 시청 그 위쪽으로는 다 비포장 흙길이었다고 기억한다.

 

▲ 처녀 때 다닌 안동미용학교 졸업식 사진 Ⓒ임옥순
 

"미용학교 다닐 때 북문동 버스터미널서 집까지 버스를 타도 한 시간이 넘는 거리였어. 여자애들이 늦게 다닐 수도 없고 해서 방을 얻어 자취를 하면서 미용 배우러 다니고 했지. 멋 내는 것에 흥미도 많을 나이인데다 머리를 만지는 걸 배우니까 재미있었지. 배워서 언니 머리, 친구들 멀리 다 만져주고. 그런데 미용학교 마치고 얼마 안 있다 시집가는 바람에 미장원 일을 하지는 않았어."

 

결혼을 하고 이사도 여러 번 다녔다. 옥야동에서도 살고 당북동 쪽에도 살다가 북문동으로 와서는 태사묘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바로 옆 골목에 집을 얻어 살았다.

 

▲재건운동본부에서 마을금고 만드는 일을 했던 남편 이문원 Ⓒ임옥순
 

"옛날 태사묘 바로 옆 왼쪽 골목에 집이 있었어. 애들 아버지가 그때 분수대 쪽에 있던 국민운동재건본부에서 마을금고 일을 하고 있어서 그쪽에 집을 얻은 거지. 골목 안 두 번째 한옥집이었는데 태사묘 하고 담장 하나로 이웃하고 있어서 우리집 툇마루에 서면 담장 너머로 태사묘가 다 보였어. 태사묘에서 제사 지내고 하는 것도 다 보였지. 애들이 태사묘 잔디가 깔린 마당에도 많이 가서 놀았어. 큰애가 세발자전거 타고 가서 세워놓고 시청 앞 분수대에 들어가 물놀이 하고 있는 걸 잡아온 적도 있어."

 

옥순씨 바로 옆집이자 골목안 첫 번째 집은 총을 팔던 총포사여서 엽총을 든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들었고, 그 골목을 따라 가면 북문시장이 나왔다.

 

"그 샛골목 따라 쭉 가면 북문시장이랬어. 그때는 복개를 하기 전이랬는데 개천둑 양쪽으로 가게들이 있었어. 분수대에서 올라가면서 왼쪽으로 목욕탕, 이발소가 있었고 이쪽에 국수가게, 기름방, 식육점 그런 게 있었어. 북문시장에 국수 사러 가다가 골목에서 바바리맨 만나서 기겁하기도 하고 그랬어. 그때는 버스터미널도 북문동 다리 있는데 있었어. 집에 갈 때 거기서 덜컹거리는 버스 타고 집에 가고 했던 기억이 많지."

 

▲ 태사묘 잔디밭에서 놀던 옥순씨네 아들 형제. 1970년대. Ⓒ임옥순
 

북문동 살면서 가장 기억나는 일로 옥순씨는 연탄파동을 꼽았다.

 

"그때 연탄파동이 났어. 석유파동이 어떻고 하더니 동네 연탄보급소마다 연탄이 떨어져서 돈 들고 가도 연탄을 못 사는 거야. 파동이 나니까 동사무소에서 연탄 배급표를 줬어. 큰애는 걸리고 둘째는 들춰 업고 동사무소 가서 배급표 받아서 안동연탄공장으로 갔어."

 

당시 연탄공장은 강원도에서 기차로 실어오는 석탄을 받아서 만들었기에 대부분 역 근처에 있었다. 연탄공장 가서 배급표를 주면 연탄 백장을 실은 리어카가 한 대 따라나왔다.

 

"연탄 배달하는 아저씨가 연탄이 무거우니까 쉬지도 않고 빨리 가. 나는 애를 업고 하나는 손에 끌다시피 하면서 연탄리어카 따라잡던 게 지금도 기억이 나지."

 

그 연탄공장 자리는 그 뒤 북문동에 있던 버스터미널이 옮겨가 안동버스터미널이 되었고, 그리고 지금은 그 자리에 다시 대형마트가 들어서 있으니 강산이 몇 번이나 변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 연필스케치로 옥순씨가 그린 자신의 얼굴 Ⓒ임옥순

 

연탄파동이 났을 때 배급표를 들고 연탄공장에 가서 연탄을 배급받았던 옥순씨는 남편의 직장 따라 북문동 골목을 뒤로하고 대전으로 갔다가 서울로 가서 서울사람이 되었다. 서울에 살면서는 고추파동을 겪었는데, 서울서도 동사무소에서 배급표를 받아 고추상회에 가서 한 집에 몇 근씩 달아주는 대로 고추를 받아서 그해를 났던 기억이 있다. 사람과 물자가 흔하다고 해도 서민들이 사는 모습이야 어디라도 별다르지 않더라 했다.

 

태사로에서 고려의 거리를 꿈꾸는 사람

 

1987년에 KBS 안동방송국으로 발령이 나면서 북문동에서 30여년을 살아온 강점용은 1946년 생으로 경남 진주 함양이 고향이다. TV문학관을 찍으며 전국을 다니면서 안동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북문동 태사로에서 30년을 살아온 강점용 Ⓒ이미홍
 

"제가 77년도부터 하회를 들락거렸어요. 내가 들락거리던 그때만 해도 하회에 초가집에 하인들만 살았어요. 기와집에 있는 사람들은 문을 잠가 놓고 다 외지로 나가 있고 관리자만 남아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TV문학관 할 때 하회마을에 가서 촬영을 많이 했어요. 그때만 해도 집집이 문을 열어보면 등잔이며 병풍이며 골동품들이 가득 했어요. 촬영을 위해 전국을 다녀봤지만 안동이 제일 역사성이 깊더라 이거예요. 역사적 장소와 이야기가 안동만큼 많이 남아있는 곳이 없어요."

 

태사로와 웅부공원이 잘 보이는 도시재생센터 1층에서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자마자 대뜸 태사로의 역사성에 대한 이야기부터 꺼내는 강점용씨다.

 

"여기 안동예식장 자리가 있는 이 태사로 거리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고려시대 역사를 증명하는 태사묘가 있고, 여기 웅부공원 자리가 조선시대 안동부가 있던 장소고 맹사성이 심었다는 부신목이 있지요. 그리고 이 길을 따라 쭉 나가면 임청각이 있습니다. 임청각은 우리 근대 역사를 말해주는 상징적인 공간입니다. 그래서 저는 10년 전에 태사로 거리를 조성할 때부터 임청각을 꼭 넣어야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동네 사람들이 의외로 임청각을 멀리 생각하더라고요. 별개의 자리라고 생각하더라 이겁니다. 임청각이 우리 역사를 말해주는 근대고 그리고 월영교가 뭐죠? 스토리를 입혀 현대에 만든 다리죠. 이 태사로에서 월영교까지 고려에서, 조선, 근대, 현대까지 이렇게 시대 순으로 장소들이 놓여져 있는, 그런 곳이 세계적으로 여기 말고 없습니다."

 

▲북문동 사람들이 태사로 고려의 거리 재현을 위해 고려 왕실의 복장을 입고 있는 모습 Ⓒ강점용
 

안동이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옛날부터의 역사적인 뿌리가 튼튼히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안동이고 그리고 그 출발점이 태사로라고 그는 생각한다. 고창전투가 실제 있었고 놋다리밟기, 차전놀이의 발원지가 다 이곳과 연관이 있다. 왕건하고 견훤하고 싸웠던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원 뿌리가 있고, 노국공주와 공민왕이 남긴 유물도 있고, 놋다리밟기, 차전놀이 같은 민속놀이도 있기 때문이다. 전국에서 고려와 관련된 역사적 유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인 태사로를 사람들이 찾아오는 태사로로 만들고 싶은 것이 그의 꿈이자 도시재생센터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중구동 태사로 재생사업의 큰 줄기라고 한다. 그런데 꿈이 현실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그가 북문동에 둥지를 튼 이래로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던 일이지만, 한 사람의 개인이 노력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었다. 다행히 안동예식장 자리에 도시재생센터가 들어서면서 태사로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고 있다. 고려의 거리 이야기도 먼 일이 아니게 되었다. 그런데 태사로 골목 안 사람들이 그 일을 다 반기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일에는 그늘이 있는 법이었다.

 

"집 가진 세대주 입장하고 세입자 분들하고는 생각이 다른 것도 많지요. 이렇게 재생사업을 해서 이곳에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하면 임대료 오르고 세입자들이 쫓겨나는 사태가 온다 이거지요. 임대로 내며 장사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지요. 저도 아내하고 이 골목 안에서 오래 추어탕 장사를 했지만 상인들 입장에서는 해도 걱정, 안 해도 걱정인 거지요."

 
▲ 도시재생센터에서 바라본 부신목과 회나무가 있는 태사로 웅부공원 Ⓒ이미홍

 

"요즘도 여기 아침에 산책을 나와 보면 아침마다 저 부신목 앞에서 기도하는 할머니가 있어요. 신령한 나무, 신목이라는 거지요."

 

퇴직을 하고 아침이면 동네 산책을 하는 그저 평범한 시민이지만 태사로 조성사업을 하면서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나서서 주민들을 설득하고 다니며 안 들어도 될 말도 듣지만 그래도 이 거리의 역사성을 살리는 것이 결국은 다 같이 잘 사는 길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 친구가 보내준 모친이 했던 진주 함양 동문식당 사진. 사진 오른쪽 기와지붕 건물이 동문식당이다. (출처:함양군청)
 

그가 안동방송국으로 부임해 방송국에서 일을 할 때 부인은 북문동 골목 안에서 시어머니로부터 전수받은 추어탕 장사를 시작했다. 집을 구할 때 북문동 골목 안에 있는 집을 택한 것도 이유가 있어서였다.

 

"우리 어머니가 진주 함양에서 추어탕을 했어요. 그리고 서울 가서 형수님이 물려받아 하다가 형수 돌아가시고 우리 집사람이 이어받아서 했어요. 그러다가 내가 안동으로 오면서 여기 북문동에서 집사람이 추어탕집 문을 연 거지요. 경상도추어탕이라고 붙인 이유는 경상도하고 전라고하고 추어탕 만드는 게 달라요. 경상도 추어탕은 생채를 풋내가 안 나게 바구니에 으깨서 넣고 전라도 추어탕은 무청을 삶아서 넣어요. 그리고 툭바리가 달라요. 경상도 툭바리는 아래 위가 같아요. 남성적인 느낌이랄까, 그런데 전라도 툭바리는 하관이 좀 빠졌어요. 좀더 여성적이지요."

 

그의 모친이 함양 동문식당에서 추어탕을 할 때 전라도 남원에서는 샛집추어탕이 유명했다. 당시 두 집이 추어탕으로 양쪽 지역에서 알아주는 양대 맛집이었던 셈이다. 그런 만큼 어머니의 손맛을 이어받은 경상도추어탕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미꾸라지도 전라도는 평야가 많으니까 미꾸라지가 크고 납닥하고, 경상도는 산이 많고 개울이 좁다보니까 미꾸라지도 잘고 동글동글해요. 습생도 다른데 미꾸라지가 야행성인데 전라도 미꾸라지는 잡아넣어 놓으면 그냥 자지만 경상도 미꾸라지는 동그랗게 몸을 말고 똬바리를 틀고 머리를 틀고 있어요. 미꾸라지는 활동성이 좋은 게 맛이 더 있는데 경상도 미꾸라지가 더 많이 움직이고 훨씬 더 맛이 있어요."

 

전라도 사람들이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는 그렇게 보고 배웠다.

 

"추어탕 할 때 가을 ()’ 쓰는데 추어탕을 원래는 가을에만 먹었기 때문이에요. 왜냐, 속배추가 있어야 하니까. 가을배추속이 고소하잖아요. 그냥 야채를 삶아서 쓰면 맛이 없어요. 제피도 우리는 지리산에서 나는 것을 쓰고 추어탕을 담는 툭바리도 고향의 흙으로 만든 걸 가져와요. 추어탕은 툭바리에 먹어야 돼요. 그래서 우리집은 배달을 안 해요. 음식은 옮겨서 먹으면 맛이 달라요. 그릇도 다르고, 그리고 와서 그곳에서 먹어야만 보이지 않는 마늘이며, 제피며 그 속재료의 맛을 제대로 즐길 수가 있어요."

 

▲골목 안으로 들어가야 맛볼수 있는 경상도식 추어탕집 Ⓒ이미홍

 

그는 아들 며느리에게 추어탕 가게를 물려준 지금도 마늘을 자신이 직접 의성에 가서 눈으로 보고 사서 가져온다.

 

"추어탕에 갈아 넣을 거니까 사실 떨어진 거나 됫박을 까서 파는 마늘 사오면 가격도 더 싸지만 마늘이 단단하게 제대로 붙은 걸로 접으로 매달린 걸 사요. 마늘 사러 30년 동안 같은 집을 가요. 처음 그 집을 선정할 때도 가업을 이은 집을 찾아서 갔어요. 가업을 이은 집은 어른들들 때부터 이어온 명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소홀히 하지 않거든요. 처음에는 내가 바가지를 좀 썼어요. 30년 지난 지금은 내가 가면 가장 좋은 마늘을 가장 좋은 가격으로 줘요. 그리고 그 입소문이 안동까지 와요. 그 사장은 마늘 하나를 사도 떨어진 거는 안 사고 그리 사가더라고요."

 

광고가 따로 필요 없이 재료 하나를 구입하는 것에서부터 어머니때부터 해온 기본을 지키는 것, 그것을 아는 사람들이 경상도추어탕을 찾아온다고 그가 며느리와 아들을 앉혀놓고 늘 하는 말이다.

 

▲ 점용씨 모친이 남한테 맡기지 말라고 했던 쪽과 주걱 Ⓒ이미홍
 

경상도추어탕 집은 골목 밖에서 보면 간판이 잘 보이지 않는다. 골목 바로 앞에 와야 그제야 간판이 보이는 집이다. 소문 듣고 물어물어 찾아오는 집, 추어탕은 그렇게 골목 안에 찾아들어가 먹는 음식이라고 그는 말한다. 부인을 도와 추어탕 식당을 하면서도, 항상 보이지 않는 거에 더 신경을 쓰라던 어머니가 하신 말씀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우리 어머니가 내한테 또 뭐라 했냐 하면 장사를 할 때 쪽을 남한테 주지 마라 그랬어요. 쪽이 국자를 말하는데, 국 하나 푸는 데도 정성이 중요하다 그거지요. 옛날에 하숙할 때 하숙집 밥을 먹으면 반찬이 많은데도 집에서 먹는 거하고 맛이 달라요. 정성이 들어가는 게 다른 거지요. 그리고 국을 뜰 때 손님을 보고 떠라 그래요. 목이 굵고 짧은 사람은 많이 먹으니까 밑에 무거운 걸 떠 줘야 잘 먹었다고 그래요, 목이 가늘고 긴 사람은 가벼운 걸 좋아해요. 그러면 위에 가벼운 걸 떠줘야 좋아해요. 우리 어머니한테 배운 거지요. 쪽을 남한테 주지 마라는 그 말 속에 그런 정성이 들어 있어요. 이상하게 어릴 때 배운 건 잘 안 잊혀져요. 대학가서 배운 거나 사회에 나와서 배운 건 다 잊어버렸는데 어릴 때 들은 건 지금도 기억나요."

 

형제들 중에 막내였던 점용씨는 학교에 갔다 오면 힘들게 장사하는 어머니를 도와 국솥에 불을 떼곤 했다. 그때 어머니에게 들은 것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사는 것, 경상도추어탕이 삼대째 이어지고 있는 바탕인지도 모른다.

 

 

세벌식타자기가 있는 시청 앞 행정서사 사무소

 

북문동 분수대 앞에서 보건소를 지나 목성교에서 시청 쪽으로 꺾어들어 조금만 걸어가면 시청 정문을 살짝 비낀 자리에 김일수 행정사무소가 있다.

 

김일수씨는 1935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네 살이 되던 해 부모님 손을 잡고 귀국선을 탔고 청송군 현서면 화목에 일가가 정착을 했다. 화목에서 학교를 마친 후 면사무소에 취직을 해서 호적 관련 업무로 행정 일을 하다가 1970년대에 시험을 치고 행정서사가 되었다.

 

▲ 행정서사 김일수 Ⓒ이미홍
 

일수씨는 서른 살 무렵에 현서면에서 월곡면으로 가게 된다. 장터 앞에 자리를 잡았는데 잡고 보니 면사무소 바로 앞이었다.

 

"안동댐 되기 얼마 전일 거래. 내가 미질로 들어간 게. 월곡면 미질1동에 가서 살고 있는데 면장이 불러서 일 좀 도와달라고 그래. 당시 월곡면사무소 면장이 권한섭 면장이었는데 그분이 그전 청송 화목 살 때 내가 면에서 행정 일을 본 걸 알았어. 수몰 앞두고 민원이 하도 많아서 감당을 다 못하니까 책상을 하나 주고 호적 일을 맡겨서 무보수로 우선 일을 도와주고 있었어."

 

그런데 그때 안동군에서 행정감사가 나왔는데 당시 김상도라고 고향 선배가 안동군에 행정과장으로 왔는데 월곡면으로 사무감사를 나왔다.

 

"청송 화목 살 때 앞뒷집 살아서 잘 아시는 분인데 나를 보고 깜짝 놀래. 한참 이야기를 듣더니 내보고 뭐를 하고 싶노? 그래. 당시 면서기 전형시험이 있었어. 면서기를 할라나? 하고 싶은 거 이야기를 해보라 그래? 나는 면서기 공무원은 몸서리가 나서 안 할라니더. 행정서사를 하고 싶니더 그랬어."

 

당시에는 면 단위에 행정서사가 한 사람만 배정되었는데, 그때 월곡면에는 이미 행정서사가 있었다. 그런데 도청 행정과에 오래 근무해서 지역단위로 행정사 정원을 한 사람 더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했다. 안동군에 한 사람을 더 받아서 월곡면에 정원을 1명 더 주는 것이었다. 고향 선배의 도움으로 그동안 호적계에서 일한 경력이 인정이 돼서 서류를 제출하고 행정서사 자격증을 발급받게 된 것이다.

 

일수씨는 그길로 호적을 떼러 그전에 일하던 청송 현서면 면사무소로 갔다. 소사로 일하던 면사무소에 행정서사 자격증 발급 때문에 서류를 떼러 간 그 발걸음이 얼마나 일수씨는 행정서사가 되고 장가를 들었다.

 

"미질 갔을 때가 서른 안짝 되었을 때야. 그때 아직 장개를 안 갔을 때래. 나는 장개를 늦게 갔어. 애들이 21녀인데 중매로 혼인했지. 안에는 이름이 이정숙인데 내보다 열 살이나 아래지. 친정이 청주야. 집안 어른이 중매했지."

 

 

집이 면사무소 바로 앞 장터 쪽에 있었다. 그동안 면사무소에서 무료봉사만 하다가 자격증을 받고 집에 사무소를 차린 것이다. 면에서 문을 열고 나오면 바로 건너에 행정서사 일을 보는 일수씨네 집이 보였다.

 

"면소 일을 그만두고 행정서사 일을 한 거지요. 면에서도 일이 많고 또 서류 같은 거 만들어야 하는 거 있으면 보내고, 다 우리집으로 일을 보러 오는 거예요. 면소 바로 앞이다 보니 일이 많았죠."

 

수몰을 앞두고 보상이며 이전이며 등기며 일을 봐주며 주민들과 얼굴을 익혔던 일수씨는 장터사람들이 정산으로 이주를 할 때 같이 짐을 싸서 정산으로 갔다.

 

"수몰되면서 면사무소가 정산으로 가서 예안면사무소가 됐어요. 나도 정산으로 올라가서 그때 일을 많이 했어요. 면사무소하고 장터 들어선 그 일대가 다 밭이던 곳이다 보니 분할해서 지목변경 하는 것부터 건축하고 등기하고 일이 많았어요. 그전에 보상 타는 거부터 이주해서 집 짓는 거까지 행정서류가 오죽 많니껴? 행정서사가 하나뿐이라 그걸 전부 내가 다 했어요. 이주자금 타는 것도 내 손으로 다하고요."

 

▲ 김일수씨가 지금도 사용하는 오래된 세벌식타자기 Ⓒ이미홍

 

정산에서 수몰주민들의 이주가 마무리되고 안정이 되어가면서 일수씨는 안동으로 나오게 된다. 태화동에 집을 얻고, 법원이 있던 동부동 한양아파트 상가에 사무소를 열었다. 시내에 나와 사무실을 차렸을 때도 단골 중 월곡 사람들이 많았다.

 

"나와서도 옛날 월곡면 살았던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어요. 자식들 일로 찾아오는 경우가 제일 많아요. 출생신고, 전적 신고, 아들 딸 개명, 내가 그 자녀들 연령 정정도 많이 해줬어요. 공무원 시험 볼려고 하는 젊은 사람들이 주로 정정 많이 했지. 고등학교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 치려고 보니까 만 나이가 모자라는 거라. 요즘은 병원에서 태어나면 자동으로 출생신고가 되지만 그전에는 출생신고 제때 안 된 사람이 많던 때라 나이 정정 하는 사람이 많았죠. 지금 여기 시청 직원들 중에도 더러 있어요. 그때 내가 나이 정정해준 이들이 다른 데 근무하다가 시청으로 들어온 그 사람들이 지금 연령대가 최하가 계장인데 내 보면 고맙다고 그래요. 어른 때문에 잘 벌어먹고 사니더, 애 둘 놓고 잘 사니더, 그래 인사하는 사람도 있어요."

 

동네에서 아기가 태어나거나 총상이 나면 반장, 동장이 출생신고와 사망 신고할 것들을 모아서 면사무소에 가서 대신 신고를 하던 시절이었다.

 

"월곡서 일할 때 임동 장날 나가면 임동면사무소에서 동네 동장들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때는 동장들이 출생 신고, 사망 신고 같은 일을 모아서 한꺼번에 면에 가서 대신 신고하고 그랬어요. 출생 날짜 적은 거, 나이 정정 적은 거를 주머니에 넣고 장에 왔다가 술 한 잔 하는 바람에 잃어버리고 있다가 나중에 한꺼번에 하느라 제 날짜가 아닌 경우도 많고, 이름 적어준 걸 잃어버리거나 기억을 못하면 생각나는 대로 적어 넣어서 한자 뜻이 잘못 바뀌기도 하고 그런 게 많았지요 뭐."

 

▲ 몇 번을 고쳐 쓰고 있는 타자기와 전화기 한 대로 온갖 행정 민원을 해결해온 김일수 행정서사 Ⓒ이미홍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 남편 호적 잘못된 거 바로잡으러 온 부부래요. 남편이 성이 임동 중평 류씨인데 강원도 가서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다가 주인집 딸하고 결혼을 했어요. 근데 군대를 가려고 주인집 성인 박○○로 호적신고를 해서 나중에 태어난 아이들도 그 성을 따랐고요. 자식들도 다 장성하고 앞으로 더 늦기 전에 남편 본래 성도 찾아주고 자식들 위해서라도 뿌리를 찾아주고 싶다고 부인되는 사람이 왔더라고요. 여기 면사무소 찾아가고 강원도 면사무소 찾아가고를 몇 번을 했어요. 그래 결국 본래 호적으로 정정이 왰어요. 버스 타고 먼 길을 오가고 했지만 나중에 그분들이 좋아하며 고맙다고 몇 번이나 인사하는 거 보니까 마음이 참 뿌듯하더라고요. 그게 지금도 기억에 남아요.

 

돈 받고 일하고도 남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듣는 것은 그만큼 진심으로 일을 봐줬기 때문일 거다. 몇 평 안 되는 좁은 사무실에 전화기 한 대, 그리고 책상 위에 놓인 오래된 세벌식 타자기가, 남 해코지 하는 일은 돌아보지 않고 성심으로 손님들 일을 봐줬던, 행정서사 김일수가 걸어온 시간들을 묵묵히 대변해준다.

 

안동시군 통폐합 하고 시청 청사 이전할 때 일수 씨도 시청 앞 지금의 자리로 이전을 했다. 처음 이전을 할 때만 해도 일거리가 많았지만 전자정부가 되고 컴퓨터로 앉아서 클릭 한 번으로 대부분의 서류를 주고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자연 행정서사 사무실을 찾는 사람도 줄어들고 있다.

 

"안동댐 만들 때도 일이 많았고 80년대, 90년대 때도 일이 많았어요. 시군통합 되면서 새로 고치고 바뀌고 하는 게 많다보니 그때도 서류 일이 많았어요. 그런데 요즘은 웬만한 거는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서류 떼고 다 하니까 일이 별로 없어요. 나이 정정 하는 일이나 호적 정정, 개명 그런 일들이지. 한양 아파트 쪽에 있다가 시청 새로 짓고 난 뒤에 여기로 왔는데 요즘은 그저 소일삼아 나와서 문 열어놓고 몇 시간 앉아 있다가 들어가는 거지요."

 

▲시청 앞 김일수 행정서사 사무실이 있는 시청 앞 골목 풍경 Ⓒ이미홍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와 고소장을 써 달라고 한다.

 

"고소장은 안 씁니다. 다른 데 가보세요."

 

그 소리에 두 마디도 안 듣고 거절을 하고 손님을 돌려세운다.

 

"시청 앞에 있으니까 문 열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래도 더러 있어요. 혼인신고 하는 요새 신혼부부들 중에 신랑 신부가 어려운 한자 이름 잘 몰라서 오는 경우도 있고, 잘못된 호적 밝히려고 오는 사람도 있어요. 또 많이 하는 게 시골 산골짜기 땅 산 서울사람들 농지취득자격증명서 같은 서류 대신 발급받아주는 거래요. 지금도 서울서 땅 사러 많이 오지만 안동댐 되고 난 뒤로 외지 사람들이 와룡 도산 쪽으로 산이나 골짜기 밭까지 서울사람들이 와서 많이 샀어요. 외지서 일일이 왔다갔다하기 힘드니까 우리 같은 사람에게 위임하는 거지. 그런데 요즘 문 열고 들어오는 사람 중에 고소장 써달라는 게 제일 많아요. 그런데 나는 그런 건 일절 안 받아요."

 

고소 고발은 상대가 있는 일이라 누구 한 사람은 가해자 만들거나 피해자 만드는 일이라 잠깐 서류 한 장 써주면 5만원을 벌 수 있지만 그거 벌자고 남 못할 일 할 수는 없다는 일수씨는 일이 있으나 없으나 집에서 자전거 타고 나와서 문열고 있다가 손님이 영 없으면 좀 일찍 들어가기도 한다. 펼생 김일수 행정사의 발 노릇을 한 자전거가 시청 앞 김일수사무소 옆 한쪽에 기대어 세워져 있으면 안에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천리천의 복개와 번성했던 북문시장

 

안동댐이 준공될 무렵을 전후해서 천리천 복개사업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안막동에서 북문동 앞을 지나 낙동강으로 흘러들던 개천 양옆으로 가게들이 들어서 장이 섰던 북문장은 복개천을 중심으로 천막들과 가게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면서 새롭게 형성되어 5일장이 번성하고 늘어나는 주민수와 더불어 상설시장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거기에는 안동댐 건설이 마무리되고 1976년부터 담수를 시작한 안동댐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이주를 했는데 보상을 넉넉하게 받아 대도시로 떠난 일부를 제외한 많은 사람들이 인근 지역이나 안동 시내로 이주한 영향도 한 몫을 했다. 시내에서 북쪽 방면에 위치한 와룡면, 예안면, 도산면 일대의 수몰민들도 안동 시내로 나와 터전을 잡았는데 태화동, 평화동 일대와 법흥동 일대에 자리를 잡은 이들도 많았지만 고향에서 나오는 길목인 북문동, 율세동, 신안동 쪽에 터를 잡고 둥지를 튼 사람도 많았다. 농사 대신 먹고 살 길을 찾던 이들이 시장 안에 자리를 잡고 장사를 시작했고, 시장 입구에 버스정류소가 있어 안동 장날이면 와룡면, 예안면, 도산면 일대에서 장보러 나온 사람들로 북문시장은 성시를 이루었다. 파는 이들과 사는 이들이 서로 고향사람들 소식을 나누기도 했다.

 

▲ 북문시장 전경 Ⓒ임덕자
 

북문시장을 살리고 싶은 시민광장 맛집 주인이야기

 

▲ 북문시장 시민맛집광장 주인 임덕자 Ⓒ이미홍
 

안동시 녹전면이 고향인 임덕자는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녹전에서 다니고 여고 진학을 하면서 안동으로 나왔다. 언니는 경안여상을 다니고 덕자씨는 안동여고를 다녀서 같이 자취를 하면서 북문시장에서 칼국수도 먹고 붕어빵, 찐빵 같은 주전부리들을 사먹었던 추억이 많다.

 

그때 북문장에 병아리며 강아지, 토끼 등을 집에서 길러 장날에 새끼들을 가져와 파는 동물시장도 유명했다. 햇살이 따뜻한 봄날 오후 노란병아리 앞에서 발을 떼지 못하다가 병아리를 사들고 가던 초등학생들이 있었고, 갓 태어난 강아지의 귀여운 눈망울에 동동거리던 여학생들도 있었다. 시골에서는 부업으로 동물들을 길러 장날 나와서 팔았고, 마당 있는 집이 대부분인 시절이라 아이들이 있는 집에서는 강아지를 많이 사갔고, 직접 낳은 달걀을 먹기 위해서 중병아리를 사다가 키우는 경우도 적지 않았던, 마당이 있고 골목 안 삶이 있던 시절 이야기다.

 

▲ 교복을 입고 있는 중학생 시절의 덕자씨 Ⓒ임덕자
 
▲ 안동댐에서 엄마와 고등학교 다닐 무렵 엄마와 안동댐에 간 덕자씨 Ⓒ임덕자

 

덕자씨가 안동에서 대학을 들어갔던 그해는 아시안게임이 있었던 해였다. 대학1학년이었던 덕자씨는 서울 구경도 할 겸 자원봉사로 등록을 했고 아시안게임이 열리던 10일간 자원봉사를 마치고 난 후, 서울에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동안 우물안 개구리로만 살았다는 걸 그 열흘 동안 세계에서 온 젊은이들을 만나고, 서울 학생들을 보면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왜 내가 안동에서 학교를 꼭 마쳐야 하지? 라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자원봉사단 단장님을 졸졸 쫓아다니면서 취직시켜 달라고 졸랐어요. 우선 돈을 벌어야 서울에서 살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해서 들어간 곳이 고려여행사였어요. 여행사 직원으로 10년을 일했죠."

 

그 시기동안 남편을 만나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그러다가 시어머니가 거동이 힘들게 되면서 집을 정리하고 시댁이 있는 전북 김제로 내려갔고, 농사꾼이 되었다. 김제는 들이 넓었고 논이 많았다. 자연 쌀이 넘쳐났다.

 

▲ 김제로 내려갈 무렵의 덕자씨네 가족 Ⓒ임덕자
 

"저도 시골 내려갔으니까 농사를 지었죠. 그런데 아는 분이 토마토 농장을 하는데 자꾸 토마토를 가져다 먹으라고 주는 거예요. 토마토 값이 떨어져서 출하를 많이 못하면 이웃과 나눠 먹으라고 몇 박스를 주고 그래요. 그래서 제가 그냥 공짜로 나눠줄 거면 내가 가져가서 한 번 팔아보겠다고 하니까 토마토를 실어주면서 팔아서 트럭 한 대에 7만원만 달라고 그래요. 그걸 싣고 전주시내 아파트 단지에 가서 팔아서 30만원을 벌었어요."

 

그걸 계기로 동네 시간이 있는 부녀회 동생들 몇에게 같이 토마토를 팔아보지 않겠느냐고 하니 남편들이 타던 트럭이 있는 부인들 셋 집이 하겠다고 나섰다. 트럭마다 전주 시내를 수소문해서 팔 곳을 정해줬다. 그때 같이 토마토 장사를 시작했던 사람들은 다 부자가 됐고 지금도 김제에서 유통업을 하고 있다.

 

토마토를 팔면서 보니 김제에는 쌀이 지천이고 이웃한 논산에는 딸기, 토마토가 지천이었다. 두 지역의 농민회 사람들을 모아 지역협동조합을 만들었다. 김제 사람들은 딸기와 토마토 같은 싱싱한 제철 과일들을 좀 더 싸게 구입할 수 있었고 논산 사람들은 주식인 쌀을 더 저렴하게 공급받을 수 있으니 모두가 환영이었다. 조합원인 농민들도 지역주민들도 이득이고 판로 확보도 되니 일이 점점 커져서 대도시 직거래도 했다. 그때고 지금이고 무슨 일을 해도 혼자 잘 먹지 않고 남들하고 같이 잘 먹고 사는 게 좋다는 게 덕자씨의 지론이다.

 

▲ 북문시장 시장들을 바꾸고 싶은 마음으로 꽃을 키우는 덕자씨네 가게 Ⓒ이미홍

 

2015년 덕자씨는 엄마를 모시고 고향인 안동으로 왔고, 서부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다음해 안동은 길안댐으로 시끄러웠다. 그리고 환경운동 활동가이기도 한 덕자씨는 그때 길안천지키기범시민연대간사 일을 맡고 있었고, 길안천을 지키기 위해 시청 앞에서 185일 동안 1인 시위를 했다. 그러면서 잊혀졌던 북문시장을 다시 보게 되었다. 시작은 시위를 시작하기 전이나 끝난 후에 배가 고파 밥을 사먹으러 시장 안으로 들어가면서부터였다. 시장 안에 들어갔는데 문 열린 밥집이 없었고, 먹을 만한 식당도 없었다. 오래 전 드나들었던 활기 넘치던 북문시장을 알았던 덕자씨는 충격을 받았다. 제대로 된 식당이 없는 것은 그렇다 치고, 가게들에 천막들이 여기저기 쳐져 있었다.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고 썰렁한 데다 천막이 쳐진 시장 안은 70년대의 모습 그대로 멈춰 서서 세월 속에 방치돼 낡아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정말 깜짝 놀랐어요. 그리고 몇 번 더 들어와보니까 시장 안 모습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낡고 허름한데 옛날 골목들이며 가게 자리들이 그 모습 그대로인 거예요.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시청 바로 앞인데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밥장사만 해도 제대로 먹고 살 수 있을 텐데, 70년대 그대로의 모습을 잘만 정비만 해도 살 길이 보일 텐데, 진짜 안타깝더라고요."

 

생각하면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게 덕자씨 스타일이었다. 지역구 시의원들도 만나고 시청 다니는 고향 선배들한테도 물어보고 다녔다. 아니 왜 북문시장을 저렇게 그냥 두느냐는 거듭된 물음에 돌아온 답은 상인회가 없어서 개인 점포들을 상대로 지원해주기도 쉽지 않고 사업을 추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했다. 상인회가 있으면 그런 것들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냐고 했더니 그렇다고 했다. 상인회를 만들면 환경개선사업을 지원해주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해 12, 덕자씨는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시청에서 가까운 입구 쪽 점포를 임대해 식당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시장 어르신들을 만나고 다녔어요. 제가 총대를 멜 테니 시장상인회 만들자고 설득하러 집집마다 다녔어요. 그런데 시장 분들이 다들 좋다고 하시는 거예요. 이제 시장이 더 죽을 것도 없다고, 천막만 걷어내도 좋겠다고, 뭐라도 해보자고 하시더라고요. 상인회 만들어서 등록하고 그 다음해 봄에 시장 환경개선사업 신청을 해서 예산을 받았어요."

 

그 예산으로 비가림막 설치를 했다. 그리고 간판도 교체했다. 그러나 시설이 조금 정비된다고 당장 시장이 살아나는 것은 아니었다. 고령의 상인들이 대부분이라 무언가를 선뜻 바꾸거나 받아들이는 것도 쉽지 않지만, 어떻게 할 줄 몰라서 못하는 부분도 많았다. 식당 일에 아름다운 재단 프로젝트 공모사업으로 진행하는 영풍제련소 현장모니터링과 기록 활동도 겸하고 있어 시장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애를 쓰지만 사실 시간도 모자라고 모르는 것도 많다 보니 한계가 있다고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래도 실망하지도 포기하지도 않고 열심히 길을 찾아보고 사람들을 만나고 같이 살 궁리를 한다.

 
▲ 시장을 살리기 위해 장흥시장을 찾은 북문시장 시장상인회 사람들 Ⓒ임덕자

 

"저는 무슨 일을 할 때 한 사람만 제대로 미쳐도 뭔가 된다고 봐요. 북문시장에서는 제가 미쳤어요."

 

지난여름에 처음 만났을 때 덕자씨가 했던 말이다. 서울서도 살고 김제서도 살고 안동에서도 살았는데, 다른 곳보다 안동이 전국에서도 먹고살기가 힘든 곳이더라고요. 물산이 풍부하지도 않고 공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보니까 같이 열심히 해서 같이 잘 살자고 하는 그런 게 약하더라고요. 공유하고 나누면서 같이 잘 살아야 신이 나잖아요. 북문시장 일에 열심인 걸 보고 어떤 사람들은 뭔가 돈이 되니까 이익이 도니까 하는 거지 그런 말들을 해요. 국밥봉사를 하고 있으면 젊은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요즘 시장에 저런 거 다 지원받아 하는 거지 그래요.

 

그런데 덕자씨는 그런 면에서 떳떳하다. 돈 때문에 사람들 사이가 틀어지거나 잘못된 오해로 북문시장 살리기가 잘못되지 않게 하기 위해 덕자씨는 상인들을 설득해 지원금을 상인회 통장으로 받지도 집행하지도 않았다. 시청 담당자가 집행을 하면 거꾸로 감시를 상인회에서 하고 있다. 시에서 북문시장 상인회를 믿고 시장 활성화 사업을 적극 밀어주는 것도 그렇게 형성된 신뢰감 때문이다. 그런 덕자씨를 힘들게 하는 건 사실 그런 것들보다 시장 안에서 벌어먹고 사는 것에 대한 안동 어른들의 고정관념이다.

 

"우리 엄마 아시는 분이 지나가다가 제가 장터에서 국밥 파는 걸 보셨나봐요. 장터에서 국밥 파느라 고생하더라고. 우리 엄마도 저한테 멀쩡하게 직장 다니며 돈 잘 벌 수 있는데 장터에서 국밥판다는 소리 듣기 싫다고 그러기도 했어요. 그래도 저는 열심히 땀 흘리며 시장 사람들하고 같이 일하는 게 좋아요."

 

▲ 장터에서 국밥봉사도 하고 팔기도 하는 덕자씨와 북문시장 부녀회 사람들 Ⓒ이미홍
 

여름 지나고 가을에 문턱에 들어서는 10월에 장날 풍경을 찍으러 다시 갔을 때 덕자씨는 시장 부녀회원들과 장터에서 국밥을 팔고 있었다. 직접 지은 농산물을 북문시장에 팔러 오는 이들에게는 국밥을 무료로 나누어주었다. 나머지 시장 상인들과 손님들에게는 국밥 한 그릇에 3천원을 받고 팔았다. 장터 인심이 묻어나는 국밥이라 더 따뜻하고 든든한 한 끼였다.

 

파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물건을 사러 장을 찾는 사람들도 늘게 마련이었다. 시장 안에 전을 펴는 노점상들에게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명찰을 만들어 목에 걸어주십사 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팔려고 가지고 나온 물건의 생산지와 품목을 적었다. ‘○○○ , 010- ****- ****, 와룡면 태자리, , 고추, 도라지 명찰이 곧 국산 농산물인증카드였다. 파는 사람들이 밭에서 직접 기른 농산물이라는 것을 소비자들이 알게 하기 위함이기도 했고, 그 분들을 상인회 외 북문시장의 별도 회원으로 등록하는 의미이기도 했다. 처음에 열 몇 명이던 노점상들이 국밥봉사를 시작하고 명찰 인증제를 하면서 지금은 57명으로 늘어났다. 불과 한 두달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이분들을 포함해서 와룡, 예안, 도산의 농민들과 함께 조합을 만들어 로컬푸드사업단을 조직해서 직거래장터 사업을 할 구상을 하고 있다는 덕자씨가 사실 처음 북문시장에 오면서 하고 싶었던 것은 시장 안 아지매들하고 장터 먹거리 조합을 만드는 것이었다.

 

"묵 잘 만드는 아지매도 있고, 손두부 잘 만드는 아지매도 있고, 막걸리 잘 담는 아지매도 있어요. 이분들하고 마을조합 만들어서 묵하고 손두부 만들어 팔 거예요. 그걸 하려면 교육을 먼저 받아야 하는데 세 분이 내년에 저하고 같이 교육 받기로 했어요. 두부 만들어서 시장 안에서도 팔고 안동역 앞에 가서도 팔고 할 거예요."

 

북문시장에서 장사하는 시장 사람들이 열심히 해서 시장도 살리고 돈돈 많이 벌어서 다같이 잘 사는 것이 덕자씨 마음이다.

 

"뭘해도 여기 시장 사람들하고 같이 만들어서 같이 잘 살고 싶고, 농사 힘들게 짓는 분들 농산물도 같이 팔아서 같이 잘 살고 싶지 저 혼자 궁리해서 혼자 잘 살고 싶지는 않아요. 그런 거는 왠지 신이 안 나요."

 

 

장날이면 만날 수 있는 북문장 난전 아지매들

 

장날이면 시장 안 삼거리 공터에 아침 일찍부터 자리를 잡고 보따리를 푸는 아지매들이 있다. 농사지은 나물이며 곡식을 가지고 장보러 오는 난전 아지매 장꾼들이다. 장터 골목 안쪽 담벼락 앞에 전을 펴고 도라지와 생강을 비롯한 채소들을 파는 오금자 아지매는 와룡 태자리서 농사를 짓는다. 명찰을 보고 안 내용이다.

 

▲ 태자리서 온 오금자 아지매 Ⓒ이미홍
 

11시가 한참 넘은 시간이었는데 손님을 한 사람이라도 놓칠까봐 여태 국밥을 못 먹었다며 국밥 솥이 있는 천막 쪽을 연신 보시더니 점심시간이 되어 국밥봉사가 끝날까 걱정이 되는지 잠깐만 자리를 지켜달라며 도라지는 5천원, 생강도 5천원, 고추는 3천원, 배추, 쪽파는 2천원이라고 가격을 말해주고는 국밥을 먹으러 갔다. 그런데 그 사이 할아버지 손님이 왔다. 보더니 대뜸, 주인은 어디 갔냐고 묻는다. 국밥 먹으러 잠깐 가셨다 하니 가지 않고 좌판 앞에 서신다. 어설픈 여인네 대신 좌판을 지키고 계시는 모양새다. 간판도 없는 장사지만 단골이신 듯 했다. 좀 있자니까 또 장에 나온 할머니 두 분이 길가다 앞에 서는가 했더니 묻지도 않고 세 분이서 이야기를 나눈다. 지난 장에는 뭘 샀는지, 점심은 자셨는지 주거니 받거니 하고들 계시는데 오금자 아지매가 왔다. 장사가 못 미더워 국밥 한 그릇을 받아서 들고 오신 거였다. 그제야 어르신이 등 뒤로 감추고 계시던 빈 포대자루들을 건네신다. 자연스럽게 받는 아지매, 그리고 스스럼없이 남의 도라지 농사, 생강 수매 걱정을 하는 할매들, 물건을 사지 않는 날이라도 안부는 묻고 가는 정이 남아있는 것이 북문장날 풍경이다.

 

"올해는 도라지와 생강이 잘 됐니더. 도라지 한 바가지 가지고 가소." 해서 한 손에 카메라를 옮겨들고 오천원을 치르고 도라지를 샀다.

 

▲ 도산면 의일리에서 농사짓는 오천댁 Ⓒ이미홍
 

도산 의일리서 온 아지매는 이름을 묻자 친정이 와룡 오천이라 오천댁이라고 했다. 집이 의일리 중에서도 물가에 가까운 곳으로 안동댐이 만들어질 때 살고 있는 집 바로 아래까지 물이 차올랐는데, 집은 수몰되었지만 토지는 잠기지 않아 남아서 평생 농사지어서 북문장에 내다 판 역사가 오래 되었다. 오천댁 아지매가 이날 가져온 건 끝물 고추와 나물이었다.

 

▲ 북문장 고추장사 이국주 Ⓒ이미홍

 

이날 장에는 김장철이 다가오고 있어서인지 고추장사 아주머니도 보였다. 올해 78세인 이국주 아지매는 스물다섯에 행상을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고추장사를 한 지는 30년이라고 했다. 아주머니가 처음 고추장사를 시작했던 당시만 해도 북문시장은 장날 새벽이면 전국의 상인들이 돈다발을 들고 고추를 사러 찾아오는 알아주는 큰 장이었다. 몇 백만 원, 몇 천만 원이 오가는 경우도 많아 경찰이 지키고 서기도 했다고 한다. 요새는 장사가 그럭저럭 겨우 먹고 살만한 정도이다.

 

▲ 씨앗가게 장갑순 할매 Ⓒ이미홍
 

북문시장에서 씨앗가게 장갑순 할매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1930년 경오년생인 할매는 율세동으로 이사 와서 장사를 시작한 이래로 북문시장서 평생을 보냈다. 한나절 앉아 있어도 씨앗은커녕 고무줄 한 다발도 못 팔 때도 많지만 집에 있으면 심심해서 나온다고 했다. 보통은 시장 안 그릇 철물점 앞이 고정석이지만 장날은 노점장터로 자리를 옮긴다. 옆에 앉은 오천댁 아지매와 자식 이야기도 하고, 물 건파는 것보다 오래봐 단골이 된 할매들이 장에 나오면 얼굴 보는 그 재미가 좋아서 오늘도 장에 나와 봤다며 웃는다. (/이미홍 lmh3377@hanmail.net)

 

안동인터넷뉴스(ksg300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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